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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여행 삶/이민

캐나다 온타리오 런던 ! 내가 이민을 오게 된 이유

 

나는 왜 어떻게 이민을 온건가? 부터 말하는 것이 순서일 듯 싶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이민을 가고 싶지 않았다.  특히, 캐나다로는 말이다.  여전히 이민병이 걸렸던 것은 맞다.  미국 서부에 출장을 가서 산타바바라에서 샌디에고까지 101 해안고속도를 달리고 부터 젊은 나이에 이민병이 생겨났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너무 단순하고 치기어린 동기였다.   

나의 이민병의 목적지는 미국 서부... 내가 렌트한 컨버터블 스포츠카로 달렸던 산타바바라와 샌디에고사이 그 어디였다.

그 당시 나는 완전히 미국 서부에 꽂혀 있던 때라 선배이신 부사장님이 극구 말리셨는데도 불구하고 명예퇴직을 신청하고, 식구들을 데리고 한 달간 SUV를 빌려 시애틀에서부터 샌디에고까지, 로스엔젤리스에서 라스베가스를 거쳐 아리조나 그랜드 캐년까지 여행을 하게 된다.   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이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나만 봐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때는 35세의 나이였으므로 정 안되면 다시 직장잡고 살면된다고 생각했고, 선무당이 주식투자한 것도 제법 잘되어 주식시장 돈이 다 내 돈처럼 보이던 때였고, 자신감도 충만한 시절이었다. 

 

캘리포니아 샌디에고 절벽 - 태평양 바다

그런데, 이민을 준비하면서 미국은 이민을 가기가 매우 어려운 나라라는 것을 서서히 알게된다.   여러가지 방법들을 모색하던 중 가장 합법적이면서 현실적인 방법은 유학을 빙자해서 간 다음, 취직과 더불어 영주권을 얻는 것이었다.   공부하기를 싫어하는 나는 투자이민도 고려해 보았다.   그러나, 이 방법은 너무 큰 돈을 주고 사는 영주권을 얻는 그런 형식이었다.   그런 큰 돈을 주고 싶지도 않았지만, 영주권이 보장되는 것 또한 아니었기에 이 방법은 포기한다.   지금도 있을진 모르겠지만, 소위 닭공장 이민이란 것이 있었다.  당시 붐처럼 이민/유학원 등에서 제시하던 방법이다.   즉, 내가 영주권을 얻기위해 2~3년이란 세월을 미국의 후미진 도시에서 닭 모가지나 생선 대가리를 잘라야 하는 방법이었다.   대학을 다니다 이민을 가게 되었던 내 친구는 그냥 관광 비자로 들어와서 개기라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게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이고, 다들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 혼자라면 바로 그리 했을 것이지만, 어린아이들과 집사람을 그런 위험에 노출하면서 까지 하고 싶진 않아 그것도 포기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다 내 돈이겠거니 했던 주식도 배우면 배울수록 수익률은 거꾸로만 갔다.  차라리 주식공부를 하지 않았던 편이 나았을 정도였다.

그러다, 캐나다 이민 바람이 불었다.   미국과 호주에 비해 이민가기가 수월하고 인종차별로 심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 캐나다로 이민을 일단 가서 미국으로 넘어가는 방법을 택하자"  지금 생각하면 참 철딱서니 없는 무계획의, 무대뽀라 아니 할 수 없다.  그 당시 캐나다 이민은 신청후 한 달안에 파일넘버를 받고, 2~3개월이면 영주권이 나오던 때였다.  물론, 지금은 캐나다도 제법 이민의 문이 좁아졌다는 걸 느끼지만.   아~ 그런데 같이 신청한 사람은 나오고 나는 한참을 더 기다려서야 나오게 된다.    이때 나는 이미 "캐나다 드러워서 안간다.  내가 니네 나라 가구 싶어서 갈려는 건 줄 아냐" 로 마음이 바뀌어 있었다.   난 이때 캐나다 이민을 가지 않았다.   서류에 싸인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그 이후로 나는 이민병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아내도 그런 거 같았다.

 

샌디에고 비치

세월이 제법 흐른 어느 날, 집사람이 캐나다로 이민을 가자는 얘기를 꺼낸다.   내 딸이 벌써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다.   딸도 가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고민스러웠다.   직장을 다니면서 항상 다니기 싫어하며 억지로 다녔는데, 이번  직장은 그나마 재미를 느끼고 있던 차였고, 생활도 안정이 되어 간다고 느끼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조기 유학의 붐이 한국을 뒤덮고 있을 때였고, 서서히 기러기 아빠들의 처참함이 뉴스를 통해 드러나기 시작할 무렵이다.   마음은 달랐지만, 캐나다 이민을 가기로 결정하고 만다.   아직도 캐나다 독립이민이 가능한 때였고, 마침 런던에 파일넘버만 가지고도 준 영주권자 신분을 준다는 프로그램이 있어 이민 수속을 다 마치고, 아이들과 아내만 먼저 캐나다 런던으로 보내고 난 기러기 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 내가 끝까지 마음속에 갖고 있던대로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보지 못한 길을 되돌아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문득 문득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기러기 생활을 하는 선배나 친구들의 모습에서 나는 계속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직장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았고, 재미도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허전함과 가족이 그립고, 외로움이 나를 점점 조여오는 듯했다.    그것을 잊으려 술과 담배가 많이 늘었고, 피곤함에도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술집에서 혼술을 하게 된다.    이 때 내 몸이 많이 상했다는 걸 나중에 알게된다.   기러기 생활 2년이 지나고 나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렇게 지내다가는 가족도 잃고 내 몸과 마음도 피폐해 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시던 회장님께 가족에게 가야겠다고 말씀드린 날, 회장님이 내게 큰 제안을 하셨다.  "내가 3개월을 줄테니, 캐나다 가서 같이 지내다 정리하고 가족 데리고 들어와라" 라고.   일주일을 줄테니 답을 달라고.   일주일 뒤, 나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만다.   사실 마음은 정말 그리하고 싶었기 때문에 괴롭고 또 회장님께는 정말 죄송스러웠다.    그러나, 내 가족과 같이 살 것이란 마음이 나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 믿었고, 나는 캐나다 뱅쿠버에서 영주권을 받아 런던으로 향한다.